
기능이 아닌 '일하는 방식'을 제안해야 합니다
ERP와 SaaS가 넘쳐나는 지금, 기능 비교표만으로는 더 나은 시스템을 고를 수 없습니다. 지적자본론의 관점으로 업무 시스템이 파는 가치가 왜 '제안'으로 바뀌었는지 짚어봅니다.
송찬영
CTO
도쿄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입니다. 그런데 책을 사러 가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거기서 책을 산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갈 때마다 한참을 머뭅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걷고, 음악 코너에 앉아 보고, 라운지에서 노트북을 펴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책을 사러 온 게 아니라,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사러 왔구나.
마스다 무네아키가 『지적자본론』에서 한 이야기가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만드는 업무 시스템 시장에도 그대로 들어맞아서, 저는 새 시스템을 볼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결국 무엇을 파는 걸까요. 마스다가 정리한 세 시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물건이 부족하면, 만드는 곳이 이깁니다
첫 시대는 결핍의 시대입니다. 물건 자체가 부족하던 때죠. 그때 고객은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느냐, 그걸 만들 수 있느냐가 전부였어요.
그래서 잘 만드는 회사가 이겼습니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찍어내는 쪽이 강자였죠. 지금도 우리가 무언가를 고를 때 일단 스펙부터 비교하는 습관은 이 시대의 흔적입니다. 다만 그 감각이 통하던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습니다.
물건이 넘치면, 고르게 해주는 곳이 이깁니다
두 번째는 선택의 시대입니다. 물건이 흔해지자 고민이 달라졌어요. ‘무엇을 살까’가 아니라 ‘어디서 고를까’가 됐습니다.
이때부터는 잘 모아 보여 주는 곳이 힘을 가졌습니다. 백화점, 대형마트, 쇼핑몰, 그리고 앱. 좋은 물건을 가진 회사보다, 좋은 물건을 골라 펼쳐 놓는 회사가 더 커졌습니다. 경쟁의 축이 ‘만드는 능력’에서 ‘고르게 하는 능력’으로 넘어간 겁니다.
이제는 플랫폼마저 넘쳐납니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시대입니다. 물건도 많고, 채널도 많고, 이제는 플랫폼까지 넘쳐납니다. 고객의 질문이 또 한 번 바뀌었어요. ‘있느냐’가 아니라 ‘나한테 맞느냐’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플랫폼을 깔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이 있다는 건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니까요. 마스다는 이때 필요한 힘을 제안 능력, 곧 지적자본이라고 불렀습니다. 넘치는 선택지 가운데 ‘당신에겐 이게 맞아요’라고 짚어 주는 능력입니다.
고객은 ‘물건’이 아니라 ‘제안’을 삽니다
마스다는 서점이 어려운 이유를 뜻밖의 곳에서 찾았습니다. “책을 팔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고객이 진짜 원하는 건 책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제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객에게 가치 있는 것은 책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제안이다.
그래서 그가 만든 츠타야는 책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팔았습니다. 같은 책을 두고도 ‘무엇을 파느냐’의 답이 달랐던 거죠. 책을 파는 회사는 온라인 서점과 가격으로 싸우지만, 취향을 파는 회사는 아예 다른 경기장에 섭니다.
책을 진열하지 않고, ‘생활 방식’을 설계했습니다
제가 다이칸야마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책을 진열한 가게가 아니라, 도시의 하루가 머무는 공간이었어요. 사기 전에 머물고, 읽고, 마시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역할도 달랐습니다. 계산만 하는 점원이 아니라, 취향을 읽고 골라 주는 컨시어지가 있었어요. 책을 상품으로 쌓아 두는 대신, 책을 매개로 한 생활 방식을 설계한 겁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이 책 한 권 안 사고도 그곳에서 시간을 사 가는 거죠.
질문이 바뀌면, 파는 것이 바뀝니다
핵심은 질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어느 장르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떤 삶의 장면을 원하는가’. 묻는 게 바뀌는 순간, 내놓는 답도 통째로 바뀝니다.
유럽 여행을 앞둔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그에게 정말 필요한 건 가이드북 한 권이 아닙니다. 여행 잡지, 그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음식과 음악까지. 삶의 한 장면으로 연결된 제안이죠. 장르를 물으면 책장을 안내하지만, 삶의 장면을 물으면 경험을 설계하게 됩니다.
업무 시스템도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오면서 저는 계속 우리 일을 떠올렸습니다. 업무 시스템 시장도 똑같은 길을 걷고 있거든요. 한때는 시스템이 귀해서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이겼고, 다음엔 더 쓰기 편한 플랫폼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ERP도, SaaS도 넘쳐납니다. AI를 쓰면 누구나 도구를 뚝딱 만들어요. 그래서 고객은 더 이상 ‘이 기능이 있나요’를 묻지 않습니다. 진짜 질문은 하나예요. ‘이걸 쓰면 우리 회사가 더 똑똑하게 일하게 되나요?’
같은 기능도 이 질문 앞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전표 입력은 화면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 보이는 경험이고, 프로젝트 관리는 표가 아니라 어떤 사업이 돈이 되는지 바로 판단하는 경험입니다. 대시보드는 차트가 아니라, 일주일 걸리던 분석을 십 분에 끝내고 더 빨리 결정하는 경험이고요. 고객이 사는 건 기능의 이름이 아니라, 달라진 일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AI 시대의 개발자도 다시 정의됩니다
이 흐름은 만드는 사람의 자리까지 흔듭니다. 예전의 개발자가 요구사항을 받아 코드로 옮기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고객이 어떻게 일하면 좋을지를 설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현이 쉬워질수록, 무엇을 구현할지 정하는 일의 값은 오히려 올라갑니다. ‘이 기능을 어떻게 만들지’보다 ‘이 회사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지’가 먼저 와야 하는 이유예요. 같은 코드를 짜더라도, 기능을 납품하는 일과 업무경험을 설계하는 일은 결국 다른 직업입니다.
다시, 우리는 무엇을 파는가
그래서 저는 우리가 ERP라는 물건을 파는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건네고 싶은 건 더 정교하게 일하고, 더 빨리 판단하고, 더 멀리 내다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츠타야가 책이 아니라 시간을 팔았듯이요.
혹시 지금 새 시스템을 고르고 계신다면, 기능 개수를 세기 전에 이걸 한번 그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걸 들인 다음 날, 우리 팀의 하루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그 그림이 선명할수록 좋은 선택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지금 무엇을 사고, 또 무엇을 팔고 있나요. 저도 그 질문을 품고 다음 시스템을 만들러 갑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