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를 춤추게 했던 거인의 죽음,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
IBM의 전설적인 경영자 루 거스너의 부고를 통해, 현대 IT 개발 조직이 마주한 기술 지상주의의 한계와 고객 중심의 통합 가치, 그리고 문화의 중요성을 되짚어봅니다.
송찬영
CTO

안녕하세요. 풀링포레스트 CTO 송찬영입니다.
어제, IT 업계의 거대한 별이 졌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IBM을 파산 위기에서 구해내고 거대한 코끼리를 춤추게 만들었던 전설적인 경영자, 루 거스너(Lou Gerstner)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발자로 시작해 기술 리더가 된 저에게, 그의 부고는 단순한 뉴스 그 이상의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기술 리더십을 맡았을 때 저는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고 비즈니스가 복잡해질수록, 30년 전 루 거스너가 IBM에서 겪었던 문제들이 우리 팀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은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엔지니어링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그냥 이야기나 합시다 (Let’s just talk)."
거스너가 IBM에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했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는 화려한 오버헤드 프로젝터와 빽빽한 슬라이드로 가득 찬 내부 보고를 중단시키고, 프로젝터를 끈 채 그냥 대화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장면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 개발 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끼리의 언어'에 갇혀 있나요? 아키텍처가 얼마나 우아한지, 이번에 도입한 최신 LLM 모델의 파라미터가 얼마나 큰지, 코드가 얼마나 깔끔하게 리팩토링 되었는지에 몰두하느라 정작 "고객이 지금 무엇을 힘들어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했습니다.
풀링포레스트에서도 비슷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엔지니어링 팀은 완벽한 MSA(Microservices Architecture) 구조를 설계하고 최신 스택으로 전환하는 데 6개월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운영팀과 고객은 잦은 배포 지연과 복잡해진 사용성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우리는 '기술적 완성도'라는 내부 지표에 취해 있었던 겁니다. 거스너는 IBM이 고객의 성과가 아니라, 내부의 프로세스와 정치, 구조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도구(Tool)와 프로세스에 매몰되어 목적(Purpose)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통합의 가치: 파편화된 기술 vs 해결된 문제
당시 IBM을 여러 회사로 쪼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을 때, 거스너는 회사를 하나로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고객은 조각난 기술 부품(CPU 따로, OS 따로, DB 따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통합된 솔루션'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통찰은 AI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요즘 우리는 수많은 SaaS와 API, 프레임워크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개발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최적의 도구를 찾아 헤매지만, 정작 고객이 마주하는 경험은 파편화되어 있기 일쑤입니다.
저도 한때는 팀원들에게 "각자 최고의 기술을 써보라"고 장려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스템의 복잡도만 올라갔고, 장애가 발생했을 때 트러블슈팅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고객은 우리가 백엔드에서 무엇을 쓰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업무가 끊김 없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술을 뽐내기보다, 기술을 어떻게 '통합'하여 가치를 전달할 것인가. 이것이 엔지니어링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문화는 전략보다 강력하다
거스너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문화는 전략의 한 부분이 아니라, 문화가 곧 전부다"라는 말일 겁니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직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곧 회사의 미래라고 믿었습니다.
CTO로서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화려한 로드맵이나 OKR 설정보다 중요한 것은, 데일리 스크럼에서 개발자가 공유하는 고민의 깊이, 동료의 PR(Pull Request)에 남기는 리뷰의 정성, 그리고 장애 발생 시 남 탓을 하기보다 원인을 파헤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AI를 활용해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려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Claude나 ChatGPT 같은 도구를 쥐여준다고 해서 혁신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비효율을 찾아내고, 관성적인 업무 방식에 "왜?"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문화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도구도 무용지물입니다. 거스너는 IBM의 거만한 엘리트 의식을 깨부수고, 현장의 목소리와 고객의 현실을 직시하는 문화를 심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현실 감각'과 '도전 정신'입니다.
마치며
루 거스너는 비스킷 회사의 CEO 출신이었습니다. 기술 비전공자가 세계 최대의 기술 기업을 구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통쾌합니다. 기술을 몰랐기에 오히려 기술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고, 비즈니스의 본질인 '고객'과 '가치'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모니터 속의 코드에서 잠시 눈을 떼고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내가 지금 작성하는 이 함수가, 내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이 버그 수정이 고객의 삶을 어떻게 더 낫게 만드는지 말입니다. 기술은 변하지만, 그 기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변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경영자의 영면을 기리며, 우리 모두가 기술의 껍데기가 아닌 본질을 꿰뚫어 보는 개발자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