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설정을 의심하라: 속도와 경험의 상관관계
제품의 속도와 사용자 경험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합니다. '진공청소기 이론'을 통해 무조건적인 속도 향상보다 의도적인 감속이 가치 전달에 왜 중요한지 고찰합니다.
최PM
시니어 Product Manager

제품을 만드는 우리에게 '속도(Velocity)'는 일종의 신앙과도 같습니다. 시장 출시 속도(Time to Market), 애자일 스프린트의 속도, 그리고 사용자가 우리 서비스를 얼마나 빠르고 매끄럽게 경험하느냐가 핵심 KPI로 설정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속도'라는 변수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최근 접한 한 아티클에서 얻은 흥미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 설정(Default Settings)'이 과연 최적의 값인지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1. 속도와 경험의 밀도: 진공청소기 이론
최근 1,500페이지에 달하는 대하소설 <반지의 제왕>을 소리 내어 읽는 실험을 한 사례를 접했습니다. 눈으로 읽는 속도 대신 입으로 말하는 속도로, 즉 평소보다 3배 느리게 읽었을 때 오히려 몰입감과 이해도가 3배 이상 증가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진공청소기 이론'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카펫을 청소할 때 흡입구를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먼지의 절반은 그대로 남습니다. 반면, 천천히 움직이면 기계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이물질의 소리가 명확히 들리며 깊숙이 박힌 먼지까지 제거됩니다.

사용자 경험(UX)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용자가 '빠르게' 과업을 달성하기를 원한다고 가정하지만, 정보의 습득이나 감상이 목적인 서비스에서 과도한 속도는 오히려 '경험의 누수'를 초래합니다. 텍스트의 맥락, 미묘한 뉘앙스, 그리고 프로덕트가 제공하는 본질적인 가치는 사용자가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때 비로소 해상도 높게 전달됩니다.
2. 무한한 공급이 만든 병목 현상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리고 사용자는 항상 서두르는 것일까요? 이는 공급 과잉의 시대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콘텐츠, 정보, 상품은 무한히 쏟아지지만,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우리의 인지 자원은 한정적입니다. 마치 초콜릿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작업자처럼, 쏟아지는 자극을 처리하기 위해 뇌는 '처리 속도'라는 다이얼을 최대로 높여버렸습니다.
문제는 이 '최대 속도'가 우리의 기본값(Default)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속도에서는 깊이 있는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그저 표면을 훑고 지나가는 얕은 소비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3. 속도는 취향을 결정한다: 3분의 1 법칙
여기서 PM으로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소비 속도가 달라지면, 소비하고자 하는 대상의 선호도(Preference)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빠른 속도는 자극적이고 표면적인 것을 선호하게 만듭니다. 숏폼 비디오, 자극적인 헤드라인, 가공된 맛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속도를 3분의 1로 늦추면, 품질의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AI가 대충 찍어낸 텍스트나 싸구려 가공식품을 천천히 음미하면 그 조악함이 즉시 감지됩니다. 반대로 잘 쓰인 고전이나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은 천천히 소비할수록 그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합니다.
이것은 우리 제품 전략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만약 당신의 제품이 깊이 있는 가치를 제공한다면, 사용자가 '천천히'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UX 장치가 필요합니다. 반대로, 사용자가 빠르게 소비하고 이탈하는 패턴을 보인다면, 그들은 당신의 제품에서 표면적인 가치만을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4. 제언: 의도적인 감속(Intentional Deceleration)
우리는 종종 효율성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과정을 단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전략을 수립하거나, 복잡한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혹은 팀원과 1:1 미팅을 할 때만큼은 '의도적인 감속'이 필요합니다.
평소 습관적인 속도의 3분의 1로 업무를 처리해 보십시오. 읽고 있는 기획서의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거나, 데이터의 행간을 천천히 추적해 보십시오. 빠르게 훑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논리적 결함이나, 새로운 인사이트가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의 뇌와 감각 기관은 생각보다 높은 사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성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입력되는 데이터의 전송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주는 여러분의 기본 속도 설정을 조금 낮춰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먼지'를 빨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